▶ 책 속으로
이 책은 《자본(Das Kapital)》에서 집대성된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최근 특성을 분석한 후 그 미래를 전망한다. 《자본》이 가지는 강점은 경제학이 불문에 부치는 전제들을 철저하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사실 경제학자들은 2000년대 내내 여러 대안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세계 경제는 대안이 나올 때마다 마치 그것을 비판이라도 하듯 더욱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었다. 2004년 미국 연방준비은행(FRB) 의장 벤 버냉키가 ‘대(大)안정기(Great Moderation)’를 주창하자 2008년 대침체(Great Recession)가 발발했고, 2010년대 세계적 경제학자들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장밋빛 미래를 전망하자 2020년 코로나 경제위기라는 잿빛 미래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21세기 경제학은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에 반복해서 실패하고 있다.
—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인공지능 기계의 발전이 산업혁명이라 불릴 수 있으려면 그것이 노동과 자본을 모두 절약하는 중립적 기술진보여야 하고, 더불어 급격히 향상된 생산성이 상품 소비로 실현되어야 한다. 미래 공장으로 이야기하는 ‘스마트팩토리(smart factory)’를 한번 보자. 스마트팩토리는 주문, 생산, 물류를 빅데이터, 전자태그(RFID), 사물인터넷(IoT) 같은 디지털 기술로 통합하고, 3D프린팅, 인공지능 로봇을 사용해 생산을 자동화한 공장을 일컫는다. 미래 공장이란 현재의 이런 기술들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을 절약하는 이 기술들이 자본도 절약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런 기술들이 자본을 절약했다면 자동차 기업들의 자산수익률이 장기적으로 상승했어야 하는데, 그런 상승은 관측되지 않는다.
— 1장. ‘4차 산업혁명이 오고 있는가?’ 중에서
디지털 서비스들은 추가 생산에 노동이 필요 없다. 예로 윈도우(Windows)의 추가 카피나 구글의 추가 검색에는 노동이 더해지지 않는다. 개발에는 많은 지적 노동이 필요하지만, 일단 개발이 끝나면 추가 노동 없이도 서비스가 무제한 가능한 것이 디지털 상품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디지털 서비스 기업들은 어떻게 돈을 벌까? … 디지털 기업의 이윤은 그 본질이 지대다. 이는 노동가치론으로 봐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노동가치론에서는 한 사회의 상품가격 총량과 지출된 노동 총량이 같다. 사회에서 노동 없는 상품이 가격을 가지면, 당연히 노동 있는 상품의 가격은 그만큼 줄어들어야 한다. 노동 없는 디지털 상품의 가격은 노동 있는 상품의 가격에서 이전된다. 이 제로섬게임은 당연히 국민경제 전체의 성장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디지털 기업들의 혁신은 전후방 산업으로 확산되기보다 다른 산업에 대한 수탈로 이어진다. 이렇게 지대를 추구하는 기업들이 경제를 주도하면 당연히 국민경제의 성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 2장. ‘디지털 경제가 성장을 이끌 수 있을까?’ 중에서
비트코인이 화폐가 될 수 있을까? 화폐는 교환수단, 지불수단, 세계화폐라는 기능을 가진다. 보편적 등가물이어야 숭배대상이 되고, 교환수단도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트코인은 교환수단조차 될 수 없다. 무의미한 연산으로 만들어지는 디지털 영수증에는 어떤 사회적 노동도 없다. 심지어 비트코인은 중앙관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제통용력을 가질 수도 없다. … 비트코인이 지불수단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컴퓨터 연산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영수증으로 채권·채무 관계를 청산할 수는 없다. 채권자가 비트코인으로 채무를 청산해 얻을 것이 없어서다. … 그렇다면 비트코인이 세계화폐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비트코인 찬양자들은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인터넷 암호화폐의 특징을 강조한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어느 나라에서도 보편적 등가물이 아니다. 더군다나 월스트리트 금융기관이 비트코인으로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미국의 항공모함이 비트코인으로 건조되는 것도 아니다. 달러가 세계화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비트코인은 아무것도 갖추지 못했다.
— 3장. ‘비트코인은 새로운 화폐인가?’ 중에서
현대화폐이론으로 불리는 새로운 통화이론을 주창하는 경제학자들은 아예 재정적자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본》의 화폐 이론으로 볼 때 이런 주장은 완벽한 오류다. 보편적 등가물로서 화폐는 어떤 방식으로 발행되든지 간에 결국에는 시민의 노동에 토대를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이 증가하지 않는데 화폐만 무한정 증가할 수는 없다. 정부(중앙은행)가 발행한 돈으로 정부 빚을 갚는다고 정부재정이 화수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 확장적 재정으로 미래 성장률을 크게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위험이 미래 세대로 전가될 뿐이다. 정부 채무의 위험성 증가는 가계부채와 기업부채 문제에 대한 정부 대응 역량을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경제의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다. 정부는 최후의 대부자로서 대응력을 확보해 놓아야 한다. 재정적자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손쉬운 선택일 수 있지만, 옳은 선택은 아니다.
— 4장. ‘재정적자, 양적완화, 인플레이션’ 중에서
참고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서유럽 노동운동에서 정착된 맥락은 한국과 다르다는 점에 유의하자. 유럽 노동조합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전국적, 산업적 단체협약을 체결하기 위한 전략적 경로로 주장했다. 예로 스웨덴 노총은 1940년대 이후 “대기업 볼보의 선반공이나 영세기업의 선반공이나 기업이 달라도 하는 일이 같으면 임금이 같다.”라는 원칙을 천명하며 기업을 넘어선 전국적 임금협약을 체결했다. 동일임금의 범위를 기업이 아니라 비슷한 일을 하는 노동자 전체 범위로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노동이 동일한지 아닌지도 기업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에 의해 규정된다. 이때 노동조합이 정하는 동일노동 집단들 사이의 임금 격차가 크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최고와 최하 차이가 두 배를 넘지 않는다. 격차가 크지 않다 보니 정교하게 동일노동들을 구별할 이유도 없다. 임금협약에서 강조한 것은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사회가 누리는 풍요는 사회적 분업을 통해 노동자가 함께 생산한 것이라는 연대의 원칙이었다.
— 6장. ‘공정한 임금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쌀이나 채소 같은 농산물 생산이 아니라 순전히 매매 차익을 목적으로 거래되는 토지, 즉 부동산 상품이 된 토지는 기본적으로 가공자본(fictitious capital)의 원리를 따른다. 자본이라는 점에서 증식은 하는데, 가공이라 함은 현재의 노동이 증식의 토대가 아니라는 의미다. 가공자본의 크기는 미래 소득에 대한 청구권 가격으로 결정된다. 임대료, 이자, 배당 같은 형태의 소득을 미래에 얼마나 청구할 수 있는지로 자산의 가격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가공자본이란 착취할 미래에 대한 기대로부터 등장한다. 예로 10억 원의 명동 한복판 점포 부지는 먼 미래까지 지대로 10억 원을 걷을 수 있다는 기대를 표현한다. 기대이기 때문에 가공자본은 주관적으로 커질 수 있고, 심지어 미래는 끝이 없으니 상한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 9장. ‘갓물주 탄생의 비밀’ 중에서
최저임금 인상의 근거가 된 임금주도성장론은 두 가지 선순환을 주장한다. 첫 번째는 ‘임금 상승 → 소비(판매) 증가 → 설비가동률 상승 → 설비투자 확대 → 고용 증가’로 이어지는 수요의 선순환이다. 그런데 이런 수요의 순환은 고용이 증가할 수 없는 상황(완전고용)이 오면 물가 상승을 일으킨다. 그래서 두 번째 순환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임금 상승 → 노동절약적 투자 증가 → 자본집약도 상승 → 노동생산성 상승’으로 이어지는 생산성의 선순환이다. 임금 상승으로부터 유도되는 노동생산성 상승은 국민경제를 장기적 성장으로 이끈다. 그러나 임금주도성장론의 문제점은 자본집약도 상승이 언제나 충분한 노동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전제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노동생산성과 자본집약도의 비율인 자본생산성은 기술과 제도가 혁명적으로 혁신된 시기를 제외하면 오히려 하락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자본생산성이 하락하는 가운데 실질임금이 상승하면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임금이 재조정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앞서 살펴본 이윤율의 동역학이다.
— 11장. ‘임금주도성장론은 착한 성장론인가?’ 중에서
자본주의적 성장이 만드는 경제적 불평등의 최종 결과는 시민 다수를 비참하게(misery)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이고 일반적인 법칙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비참하다는 것은 “빈곤, 노동의 고통, 노예상태, 무지, 포악, 도덕적 타락”이 시민에게 누적된다는 의미다. 비참함의 첫 번째 성격인 빈곤은 산업예비군의 증가를 뜻한다. 자본주의는 산업예비군을 필요로 한다. 완전고용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성장은 잘나가는 시기에도 항상 인구의 일부분을 빈곤 상태에 남겨둔다. 그리고 이윤율이 하락할 때는 산업예비군이 증가한다. 인구의 더 많은 부분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비참함의 두 번째 성격인 “노동의 고통과 노예상태”는 이윤율 하락에 대응하는 자본가의 노력을 의미한다. 기술진보의 곤란 속에서 기업이 하락하는 수익률을 반등시킬 방법은 노동자를 쥐어짜는 방법뿐이다. 해고로 노동자를 위협해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강도도 높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갑질도 난무한다. 이윤율 하락으로 산업예비군이 증가할수록 이러한 노동의 고통과 노예상태는 더 강화된다. 비참함의 마지막 성격인 “무지, 포악, 도덕적 타락”은 시민이 자본에 종속되어 시민적 윤리보다 종사자의 의무와 각자도생의 경쟁에 더욱 매달리게 된다는 의미다. 청년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청년들이 입시와 취업준비에 매몰되어 시민적 교양을 습득할 기회를 잃고, 심지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마저 공정하지 않다며 비난하는 것은 이런 도덕적 타락의 한 단면일 것이다.
— 13장. ‘유행하는 불평등 이론들의 한계’ 중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 전체의 혁명적 재구성”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 첫째는 자본의 혁명인 산업혁명이고, 둘째는 노동의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사회혁명이다. 하지만 자본의 혁명과 달리 노동의 혁명은 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없다. 소련은 붕괴했고, 중국은 당이 조절하는 시장경제로 나아갔을 뿐이다. 20세기 내내 진행된 서유럽 노동운동의 도전 역시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보완하는 수준에서 중단되었다. 21세기의 노동운동에서는 자본주의를 위협할 만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계급 모두 위기에 대응하지 못할 때 “공멸”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계급적 공멸의 한 형태가 바로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은 사회 변화에 관한 과학적 분석을 포기하고, 대신 기득권에 대한 비난, 영웅적 정치인에 대한 기대, 대중의 정념을 발산하는 정치를 확대한다. 대표적 사례가 1930년대 독일이었다. 지난 2016년 인종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내걸고 당선된 미국 트럼프 대통령 역시 그런 사례다. 21세기, 자본의 작동중지 상태에서 자본의 무능과 진보진영의 실패로 말미암아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적 공멸이라는, 체제의 극한적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 14장. ‘경제성장의 종착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