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과학, 역사, 종교, 문화,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피가 인간사에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
엮은 책이다.
책의 제목과 서문을 맞이하며 다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피를 중심으로 한 책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의학 서적이라면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범 사회 문화까지 아우르는 논픽션이자 교양서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처음이다.
대부분의 글은 독립 개념이 종속 개념의 보완을 받는 형태로 서술되는 데 종속 개념이 주가 되어 독립 개념을 엮는 구성 방식이 매우 신선
했다. 기존의 시선 방향과 프레임을 바꾸고 나니 그동안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던 혹은 고민해 볼 생각조차 못했던 주제들이 쏟아졌는데 그런 점이 이 책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말미에 언급한 감사의 글에는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배경이 적혀 있다. 전작 “똥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진지하게”가 출간된 이후 생리를 주제로 책을 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피의 모든 면을 다루는 쪽으로 범위를 넓혔다고 밝히고 있다. 덕분에 이 책은 의학, 과학, 역사, 종교, 문화, 철학 측면을 다양하게 아우르는 넓은 독자층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 제목
이 다소 독특하다. 원제는 “Nine Pints”인데 여기서 파인트라는 단위는 영국 기준으로 약 568 밀리리터이기에 9파인트는 약 5,112 밀리리터 즉 약 5리터의 피로 환산할 수 있다. 따라서 번역서의 제목도 그렇게 결정된 듯 하다.
이어지는 구성방식도 재미있다. 1장은 500밀리리터의 힘을 다루고 있는데 왜 제목과 다르게 1파인트의 피만 다루는지 궁금했다. 읽다보니 총 9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장의 무게를 1파인트의 비중으로 측정한 듯 했다. 총 9개의 장이니 제목이 Nine Pints가 되는 것 같은데 내 추측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또 하나의 추측으로는 몸속의 흐르는 피가 약 5리터에 달한다 하니 한 사람을 지탱하는 피의 양이 제목으로 선정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두가지 추측 모두 반영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논픽션의 책 치고는 구성부터 남다른 심오함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이런 과정은 어찌보면 불필요한 과정인 것 같지만 저자와 편집자의 생각을 엿보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1장에서 등장하는 500밀리리터의 힘
은 대단하다. 이 단위는 대부분의 일반인이 1회 헌혈 시 추출되는 피의 양으로도 일반적이다. 몸속을 흐르는 피의 약 10%에 해당하는 상당량이다. 즉, 이장에서는 수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헌혈
이라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세계 3초마다 누군가는 낯선 사람의 피를 받는다고 한다.
해마다 1.1억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헌혈한다고 하니 헌혈이 얼마나 대규모로 이뤄지는지 알 수 있어 놀랐고 나의 헌혈 참여 행태에 부끄러움을 느끼에 하는 계기도 되었다. 때로는 헌혈이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는 설득보다도 이 책과 같이 헌혈의 위력과 현 주소를 담담하게 논픽션으로 전달하는 것이 더 나은 설득이 되는 것 같다. 첫 장부터 이 책은 이런 묘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헌혈 외에도 이 장에는 피에 대한 많은 유용한 정보가 담겨있다. 피 검사를 통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밝힐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생물학적 나이, 실제 나이, 파킨슨 병이나 암에 걸릴 가능성, 수술 시 섬망 증상이나 심장 기능의 이상 여부에 대한 예측도 가능하다고 한다.
피가 만들어 지는 곳은 지라인줄 알았는데 비교적 최근 교육을 받고 과학에 관심이 있는 나도 피에 대해 이렇게 무지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피는 뼈안의 골수에서 만들어진다. 피는 산소와 영양분을 나르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의 운반책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온기, 호르몬, 신체 기능, 에너지, 수면, 기분을 조절하는 신호까지 나르고 있는 것이다.
최근 과학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는데 커피콩에서 추출한 효소로 B형 혈액을 O형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다. O형은 늘 주기만 하는 혈액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 O형이 억울할 일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조금은 줄은 듯 하다.
이 책이 도달하고자 하는 방향에는 철학적인 측면도 있다. 테세우스의 배
는 유명한 철학 질문 중 하나인데 우리 몸의 세포는 7년에 한 번씩 교체된다고 한다. 이 철학적 명제와 관련하여 나 역시 다섯번째 몸으로 산다고 볼 수 있겠는데 이 몸이 과연 나인지 심도 있게 생각해 볼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아무튼 1장은 피와 헌혈 및 기본적인 사회 문화와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요약하고 있기에 2장부터의 시작되는 여행을 즐기기 위해 반드시 먼저 읽어두면 좋다. 너무 많은 정보들과 생각할 주제들이 담겨 있어 하나의 장을 읽는데도 하루가 소모되었다. 피에 관해 이렇게 많은 유용한 정보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생각해 볼 거리가 많다는 점에도 놀랐다.
1장이 피의 전반을 논하고 있다면 2장 부터는 굵직한 주제들을 하나씩 파고 든다. 2장에는 피와 관련된 의학적 측면에서 치료 목적으로 활용되는 자연의 치료사이자 흡혈 악마로 취급되는 거머리
가 등장한다. 바이오팜이라는 회사에 견학 방문하며 보고 들은 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거머리가 내뿜는 마취제와 항응혈제는 인간의 과학을 앞설 정도로 뛰어난 화학 물질이다.
저자의 폭넓은 조사 덕분에 흥미로운 역사거리가 등장하는 것도 책이 가지는 매력 중 하나인데 중국 후한 시대 학자 왕충은 왕이 밥을 먹다 뜻하지 않게 거머리를 삼켰는데 덕분에 만성통증에서 해방되었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한다. 고대 바빌론의 문헌부터 나폴레옹의 일화에 이르기까지 옛 선조들이 거머리를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활용했는지의 여정을 엿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거머리에 대한 인간의 배은망덕은 지구 환경을 보존하는 측면으로 이어져 사람이 거머리에게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생각에 이르게 만들기도 한다. 피를 잘 뽑게 하기 위해 일부러 굶겨 치료에 이용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를 옮길 수 있는 능력 때문에 할 일이 끝나면 죽음을 맞는 거머리는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는 것인가?
혈액 응고, 소화, 결합 조직, 질환, 통증, 효소 억제, 항염증 등 많은 분야에서 활약하는 거머리를 이렇게 이용만하고 버리는 우리의 자세가 당연시 되는 세상이 늘 서럽다. 어쨌든 읽는 내내 논픽션이 픽션을 창출하게 만드는 책의 원동력은 정말 대단한 필력이자 장점이다.
3장에는 옥스퍼드 서머빌 출신의 재닛을 중심으로 발전된 헌혈과 관련된 기술의 발전 과정
을 엿볼 수 있다. 어찌보면 1장의 일부에 대한 확장판이라 볼 수 있겠는데 이 과정을 조사하는 저자의 탐구 절차나 과학자들의 인사이트를 얻는데 있어 배울만한 과정이 담겨 있어 가치있다는 생각을 했다.
4장은 피를 타고 퍼지는 강력한 바이러스 HIV
를 다룬다. HIV의 바이러스의 생김새부터 생김새에 종속되는 기능이 인간의 면역체계에 어떤 악영향을 주는지 매우 상세히 알 수 있다. 전 세계 3,750만명이나 감염되어있다는 사실과 케이프타운과 같은 후진국의 현실에 마음이 아팠다. 어디가나 돈으로 성을 매수하는 저질스러운 인간들을 어찌해야 할지? 책에서는 대표적으로 축복자라고 불리는 계층이 등장한다.
5장은 피를 구성하는 물질 중 가장 낮은 무게를 가진 혈장을 중심으로 혈우병
을 깊이 있게 파헤친다. 혈장의 응고인자 8번이나 정맥내 면력 글로불린이 무엇인지 배울 기회도 주어진다. 또 혈우병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그리고 영국의 유명한 여왕 엘리자베스 가문에 근친 결혼으로 전해지던 병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풍선에 물이 한없이 들어가는데 터지지 않는 느낌. 피는 남는 공간이 없을 때까지 계속 밀려들어 심지어 신경을 누른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출산의 고통을 능가하는 몇 안되는 통증이 결석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경험자가 이와 맞먹는 고통이라 판단할 정도이니 그 극심한 고통은 겪지 못한 이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6~7장은 여성의 월경
을 다룬다. 월경이 사회 문화적으로 얼마나 더러운 피로 취급 받았는지, 생리대 또한 얼마나 지저분한 천으로 여겨졌는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오늘날 후진국의 행태까지 살펴본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교양인이 출산을 위한 신성한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기에 심각성을 알지 못했는데 충분한 영양을 섭취해야 할 월경 시기에 분리된 창고로 쫓겨나 맨밥만 먹어야 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또 과학적 측면으로는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많았다. 태아가 임신부에게는 침입자이자 기생충으로 여겨지기에 모체와 태아가 충돌하는 보기 드문 종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기니 보게오섬이 월경하는 남자들의 섬으로 일컬어지며 그 섬에서 벌어지는 남자들의 추태는 혐오스럽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 생리를 부러워하거나 혹은 두려워 했던 남자들의 심리를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은 그간 알지 못한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
8장은 첫 장면부터 경이롭다. “코드 레드
. 오픈 체스트”. 출혈과 혈압 저하가 심각한 부상자를 살리기 위해 개흉 후 심장을 마사지하는 광경을 서술하는데 환자의 몸통에서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낯선 분홍색 덩어리 즉, 폐를 보는 장면은 끔찍함과 동시에 생명을 살리기 위한 행위 앞에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느끼게 해준 장면이기도 했다. 이 장에서는 출혈과 심장을 중심으로 긴박한 상황에 처한 의료진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마지막 9장은 피의 미래
를 다룬다. 명나라 황제 가정제가 젊은 여성의 월경혈로 만든 묘약을 즐겨 마셨다는 사실 때문에 후궁들이 암살 계획을 짜기까지 했다는 피로 무엇인가를 해결하고자한 기가막힌 역사적 선례들이 몇가지 등장한다. 이는 건강한 몸에서 빌린 피로 허약한 피를 고치는 헌혈과 관련된 피 과학의 현 주소까지 이어진다. 피를 향한 인간들의 욕망이 무엇이며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참고 문헌을 제외하고도 400p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읽는 내내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팩트를 읽기도 했고 철학의 영역까지 이어지는 사고로 책을 읽는 속도가 지연되기도 했다. 피를 소재로 다루는 책이 독자의 머리속에 이렇게도 다양한 모습의 화학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던 여정이었다.
모든 것을 리뷰에 언급할 수 없어 안타깝다. 떠오르는 인상적인 부분을 위주로 각 장의 내용을 요약해 보았는데 이 리뷰를 읽는 분들이 이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될 만한 리뷰인지는 자신할 수가 없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흥미로운 주제들로 가득차 있다.
때로는 미처 몰랐던 호기심이, 때로는 가슴 통탄할 사회적 배경이, 언제 어디에서나 세상을 검게 물들이는 인간의 욕심이 독자로 하여금 한 번 펼친 이 책을 쉽사리 덮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유용한 지식을 습득하거나 깨달음을 차치하고서라도 재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로써 충분할 것이다.